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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쇼다 사건(Fashoda Crisis / Incidence)
    역사, 사회, 국제시사 2024. 3. 1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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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아프리카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독일, 이탈리아 등 세계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중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서쪽 끝과 북쪽인 오늘날의 세네갈과 알제리에서부터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격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하여 오늘날의 알제리, 세네갈, 말리, 니제르, 차드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였습니다. 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니제르 강과 나일강을 끊김 없이 연결하여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는 대상(隊商) 루트를 장악함으로써 사헬 지역을 오가는 모든 무역을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프랑스는 또한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지금의 지부티)의 홍해 입구 근처에 전초 기지를 두고 있었는데, 이 전초 기지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림. 파쇼다 사건 당시 아프리카 정세 (좌 : 각국의 식민지 상황, 출처 : www.createdebate.com, 우 :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정책, 철처 : laescalderadeiakob.bolgspot.com)

    한편 이 때 영국은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고, 현재의 수단을 옴두르만 전투(1898년)에서 격파하여 나일강 중류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또한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시작하여 보츠와나, 짐바브웨, 잠비아, 케냐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남쪽 끝에서 중부까지 진출하였다. 영국은 아프리카를 남북으로 연결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식민지의 확장을 위해 쟝 밥티스트 마르샹(Jean-Baptiste Marchand) 대위를 원정대로 하여 132명을 파견하였고, 현데 콩고의 브라자빌에서 출발하여 밀림을 횡단하는 14개월의 여정 끝에 파쇼다(Fashoda, 현대 남수단의 코도크(Kodok)에 1898년 7월 10일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주둔하게 되는데 본대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고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한편 영국의 허버트 키치너 경(Herbert Kitchener) 1898년 9월 옴두르만 전투에서 승리하고 9월 18일 1500명의 군대를 파쇼다로 보내게 도고, 결국 두 국가는 파쇼다에서 대치하게 되었으며 서로 파쇼다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파쇼다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군사적으로 충돌하지 않았으며, 마르샹과 키치너는 본국의 추가적인 지시를 기다리고 하고, 서로 위스키를 같이 마시기도 하는 등 어느정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 당시 파쇼다에서 군사적으로는 영국이 프랑스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으며, 결국 프랑스는 1898년 11월 마르샹 대위에게 철수를 명령하였습니다.

    그림. 파쇼다에 상륙한 영국군(출처 : www.wikipedia.org)

    이 후 1899년 3월 영국과 프랑스의 조약이 체결되어 나일강과 콩고강의 발원지가 그들의 영향권 사이의 경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협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파쇼다 사건은 프랑스의 중대한 외교적인 패배이자 굴욕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향후 독일 등의 위협에 대해 영국과 협력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쟝 마르샹 대위는 이 후 의화단 운동사건과 세계 1차대전 등에 참전하였고, 1915년 장군으로 승진하였습니다, 1920년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932년 사망하였습니다. 허버트 키치너 경은 1902년 장군으로 승진하였고, 인도총사령관, 이집트 영사 등을 역임하면서, 보어전쟁, 이집트-수단 원정 등 영국의 굵직한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백작 작위를 받았고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전쟁담당 국무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1916년 러시아에 사절단으로 가는 도중 그가 타고 있던 배가 기뢰에 부딪쳐 침몰하는 바람에 실종되었습니다.

    그림. 좌 : 키치너 장군(영국), 우 : 마르샹 장군(프랑스) 출처 : www.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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