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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들

코알군 2024. 3. 18.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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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평양성이 668년 멸망하였을 때 당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가 이국땅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아들들 그리고 자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보장왕의 아들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고복남(高福男)

보장왕의 장남이자 태자로 태자로, 665년 10월 당에 파견되어 666년 정월에 열린 봉선(封禪) 의례에 참석하였습니다. 봉선은 태산(泰山)에서 하늘에 천하통일을 보고하고 감사하는 의례였습니다. 고복남은 그 이후,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부친 보장왕과 동생인 고덕남(高德男) 아들인 고보원 및 주요 대신과 함께 당으로 잡혀갔습니다. 고복남의 아들인 고보원(高寶元)은 685년 당나라에 의해 조선국왕에 임명되었고, 698년에는 좌응양위대장군에 임명되고 요동의 안동도호부에 파견되어 고구려 유민들을 통치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임무(高任武)

고임무(高任武)는 보장왕의 셋째 아들입니다. 647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려고 하자, 그해 12월 보장왕의 명에 의해 당나라에 간 기록이 있습니다.

 

고덕무(高德武)

고덕무(高德武)는 보장왕의 아들로, 당나라에 끌려간 뒤 699년 다시 고구려의 옛 땅으로 돌아와 안동도독부 도독에 임명되었습니다. 당나라는 그에게 요동지역의 통치권을 위임하였습니다.

 

고련(高連)

고련(高連)은 보장왕의 668년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가, 677년에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 朝鮮郡王)이 되어 요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공주(邛州)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에 사망하였습니다.

 

고인승(高仁承)

고인승(高仁承)은 보장왕의 아들이며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았으며, 나당 연합군을 피해 강원도 횡성)으로 숨어 은신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횡성 고씨(橫城 高氏)는 그를 시조 1세로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 보장와의 묘지로 추정되는 곳(좌), 고약광을 모시고 있는 고마(고려)신사(우) / 출처 (나무위키, wikipedia 등)

안승(安勝)

안승(安勝)은 고구려의 왕족으로 보덕국의 군주입니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자라는 설과 연정토의 아들이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에 의해 보덕국왕으로 봉해졌으며 금마저(전라북도 익산시)를 하사받고 고구려 유민들과 호남 지방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해 보덕국(報德國)의 왕이 되었습니다. 670년 고구려의 장군 검모잠이 당나라에 반발하여 부흥운동을 시작했을 때, 고구려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683년 문무왕의 조카딸과 결혼하고, 신문왕의 명으로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고, 김씨성을 하사받았습니다. 그는 신라가 고구려계 유민들을 대거 통합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약광(高若光)

고약광(高若光)은 고구려 왕족 출신으로 668년 1799명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일본의 무사시국(현대 일본 사이타마현)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보장왕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우지(氏)로 코마씨(高麗氏)를 받았으며 가바네로 코니키시(王)를 받아 귀화 후 정식명칭은 고마노코니키시 약광(高麗王 若光)이 되었습니다. 보통은 가바네를 생략한 코마노 약광(高麗 若光)으로 불리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현무약광(玄武若光)과 동일인물로 여겨집니다. 참고로 이 때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아직도 고려촌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고구려 멸망 전인 666년 고구려가 왜국에 파견한 사신단의 부사 자격으로 일본에 갔으나, 고구려가 멸망하여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만년의 고약광은 흰 머리칼과 흰 수염을 길러 고마군 사람들로부터 ‘흰수염 님(白髭様)’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으나, 그는, 약광은 생전에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고 합니다.

생전에 고약광은 사루타히코노미코토(猿田彦命)를 제사지내는 신사를 세우고 거기에 다케노우치노 스쿠네(武内宿禰)를 제사지내며 숭배했고, 사후에는 고마 군 사람들로부터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고약광과 같이 온 고구려 승려 승락(勝樂)이 성천원과 승락사(勝楽寺)를 세우고 그가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가져온 환희천(歡喜天)(또는 성천(聖天)이라고도 함)을 안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고약광은 사후 고마 군 주민들에 의해 불법(佛法)을 지키는 산신(山神)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종손이 대대로 승락사 안에 있는 사당(산신각)에서 제사를 집행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