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회, 국제시사

세계 운하 길이 순위 Top14(7위 ~ 1위)

코알군 2023. 6. 2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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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운하 길이 순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운하 길이라는게 사람이 파낸 부분만 할지, 강, 호수 같은 자연수로까지 포함할지에 따라 많이 틀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조사한 순위가 조금 틀릴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순위를 따지지 말고 재미로만 봐주세요~

7위 라인-마인-다뉴브 운하

마인 다뉴브 운하 (또는 라인 마인 다뉴브 운하, RMD 운하, 유로파 운하)는 뉘른베르크의 라인강과 밤베르크의 마인강, 레겐스부르크의 다뉴브강을 연결하는 운하로 로테르담에 있는 라인강 삼각주에서부터 흑해에 있는 다뉴브 강 삼각주까지를 잇는 운하로 1992년 완공되었고, 길이는 171 km입니다.

이 운하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는데, 793년 카롤루스 대제가 운하 건설을 명령하기도 하였고, 1836년부터 1846년까지 루트비히 1세 (바이에른)의 이름을 딴 루드비히 운하가 건설되었으나, 수로로 운용하는 것이 비 경제적이어서, 1950년에 마침내 폐지되었다.

현재의 운하는 정치적 논리와 환경단체 등의 반대로 11년간 공사가 중단되는 등 운하건설 과정이 순탄치 않았으나, 1992년 9월 완공되었습니다.

그림. 라인-마인-다뉴브 운하

6위 백해-발트해 운하 (볼가-발트해 수로)

백해-발트해 운하는 북극해의 일부인 백해와 발트해를 잇는 운하로 총길이 227km, 인공 수로 48km의 운하로서 1931년~1933년에 건설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운하길은 라도가호와 오네가호와 같은 큰 호수와 강을 따라 이어져 있고 19개 수문이 있는데, 오네가호와 백해 사이에 몰려있습니다. 이 운하를 통하면 스웨덴과 노르웨이 쪽의 대서양을 거치지 않고 발트해에서 백해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아르한겔스크까지 4000km의 거리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이 운하는 구 소련의 스탈린 정권 때 건설되었는데, 이 운하의 건설에는 강제수용소 죄수들이 동원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어가며 완공했다고 합니다.

구 소련의 해군 함대는 북방함대, 발트함대, 극동함대 등이 있었는데, 발트해와 백해를 이어 감시에 걸리지 않고 여러 함대의 연계를 강화시키고 자유로운 해상/해저 작전의 수행을 위해서 건설되었으며, 실제 냉전 시기 발트 함대가 유틀란트 해협을 통해서 나가기에는 나토의 감시를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회피하는 데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발트해 연안 대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라도가 호수, 오네가 호수, 비고제로 호수, 백해로 이어진다.

또한 백해-발트해 운하는 오네가호에서 마린스키 운하, 벨로제르스키 운하, 비테그라강을 통해 볼가강과 모스크바 부근에서 연결이 되는데 이를 볼가-발트해 수로라고 부릅니다. 해당 수로는 1709년 비시니볼로초크 수로, 1810년 마린스키 운하 등을 통해 수로로 연결되었는데, 19세기 초반 러시아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볼가-발트해 수로는 석유 및 목재 수출과 관광에 많이 사용되며 러시아 정부의 해양위원회에 따르면 2004년 백해-발트 수로를 통해 1760만톤의 화물이 수송되었다고 합니다.

 

5위 미디 운하

피레네 산맥에서 발원해 남부의 내륙도시인 툴루즈를 거쳐 대서양의 항구도시 보르도까지 이어지는 가론 강과 카르카손을 거쳐 지중해로 흐르는 오드 강 인근을 연결해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로 길이는 240 km입니다.

이 운하를 걸설하려는 계획은 16세기 초부터 존재하였고, 1642년에 루아르 강과 자인 강을 잇는 브라이어 운하가 건설되면서 강과 강을 연결하여 운하를 만들어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자는 계획이 탄력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1654년 피에르 폴 리케가 공사에 참여하면서 미디 운하 건설이 계획되었고, 그리고 루이 14세의 지원 하에 1666년, 착공되어 1681년에 완공됩니다. 운하는 1850년대에 보르도와 세트를 잇는 철도가 개통될 때 까지 이 지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철도 개통 이후 수송력에서는 철도에 밀리고 배가 점점 커지자 운하를 이용하기 어려워져1970년대를 끝으로 미디운하를 수송 역할은 종료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운하 크루즈 관광 사업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림. 미디 운하

4위 그랜드 유니언 운하 Grand Union Canal

영국의 잉글랜드 중부에 있는 간선 운하로서 런던(템스 강)~버밍엄(버밍엄 운하망) 및 노턴에서 리스터에 이르는 수로를 포함하고 길이는 363km입니다. 예전에 영국에서 물품을 나르는 중요한 수송로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국영운하이기는 하지만, 산책, 사이클, 낚시 등을 하는 휴식장소로 변했다고 합니다. 운하에 여러 날 정박해 있는 배에서 생활하며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

3위 이리 운하 Erie Canal

미국 뉴욕주 북서부에 있는 운하로 길이 약 584km, 깊이 12m, 표면 너비 12m이며 갑문은 83개소, 통행가능한 선박은 75톤입니다. 허드슨강 연안의 올버니에서부터 출발하여 모호크 계곡을 종관(縱貫)한 다음 버펄로 부근에서 이리호에 이르는데 1827년 완성되었습니다. 이 운하는 뉴욕주 북부, 캐나다, 서부 개척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운하입니다. 이 운하는 "미국 내 최초의 주간 고속도로"로 불리기도 합니다.

1820년에 부분적으로 완성되었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1827년입니다. 이 운하를 통해 대서양 연안의 뉴욕시와 5대호(湖)를 배로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운송비용의 95 %를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50년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철도와 운영상의 부정 등으로 1882년에 이르러 그 기능이 정지되었습니다.

그 후 뉴욕주가 운하의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1905년부터 이리 ·섐플레인 ·오스위고 ·카유가세네카 등 4개 운하를 통합하기 시작, 13년 걸려 다시 운하를 완성하였고, 이리 운하의 일부는 사적(史蹟)으로서 보존되어 있고, 이리 커낼웨이 국립 회랑(Erie Canalway National Heritage Corridor)이 자전거 애용자들이나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 이리운하

2위 카라쿰 운하 Karakum Canal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는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카라쿰운하(영어: Karakum Canal, 러시아어 : Каракумский канал)로 길이는 1375 km입니다. 1954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88년에 완공되었으며 연간 13km³의 물을 아무다리야강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사막으로 운반합니다. 이 운하를 통해 농업, 특히 소련이 강력하게 추진한 면화 단일 재배에 대한 거대한 새로운 토지를 개간이 이루어졌고, 농경지와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슈하바트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운하가 아무다리야강 수량의 절반 가까이를 가져가면서 아랄해가 마르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운하는 소련의 통치자 스탈린은 이 강물을 끌어다 카라쿰 사막에 용수로 사용해 면화를 생산할 것을 계획하여 착공되었고, 이 운하를 통해 투르크메니스탄의 사막지대는 면화 농장으로 변했고, 2011년에 투르크메니스탄의 원면 생산량은 110만 톤으로 세계 9위의 목화 생산국입니다. 그러나, 물이 운하를 흐르면서 누수되거나 증발된 양이 30~70%가 되어, 수도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시가바트는 물을 풍족하게 쓰게 되었지만, 아랄해로 들어가는 물이 부족해져, 아랄해는 말라버렸고 주변 생태계는 심각하게 파괴되었습니다.

 

1위 대운하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허베이성, 산둥성, 장쑤성, 저장성 등 4개 성(省)의 남북으로 흐르는 운하로 길이 1,789km입니다.

하이허강, 황허강, 양쯔강, 첸탕강 등 5개의 대하천 사이사이를 개착(開鑿)하여 연결한 운하로 전 구간 복원 계획을 세운 지 100년 만인 2022년 4월에 전체 길이 1,789km가 개통되었다고 하며, 1958년 대규모의 복구·확장 공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1,515km로 단축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최근의 대운하 공사를 통해 운하 연안에는 13개의 항구가 건설되었고 많은 유수량을 조절하는 수문(水門) 등이 설치되었고, 베이징의 쭤안먼[左安門] 밖에는 4,000t급 기선의 접안이 가능한 부두가 건설되어, 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2,000∼4,000t급의 선박이 취항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대운하는 수나라의 양제가 백성들의 동원하여 지은 운하로 대운하와 고구려 원정 등 무리한 정책으로 멸망하였으나, 뒤를 이은 당(唐) ·송(宋) 시대에는 대운하가 남북 수로교통의 대동맥을 이루어, 명나라, 청나라까지 강남 개발에 따른 수운(水運) 및 상업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淸)나라 말에 해운이 성해지자 상대적으로 운하의 중요성이 줄고, 다시 중화민국이 난징을 국도로 삼은 뒤에는 그 경향이 한층 심해져서 여기저기 매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 하천계획을 겸한 확장 ·복구 공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