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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과 함께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의 개국공신들

코알군 2023. 6. 1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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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원나라 말기 홍건군에 가담하여 명나라를 세워 중국 역사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람입니다. 이와 함께 자신과 함께 중국 통일을 이룬 많은 부하장수들을 같이 숙청하기도 하였는데요, 오늘은 주원장과 함께 중국을 통일한 공신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서달 徐達 (1332~1385)

자는 천덕, 호주 종리(지금의 안휘성 풍양시) 사람. 명나라 개국 군사원수이며, 주원장과 같은 고향 사람이며, 이선장, 유기와 하께 명나라 3대 개국공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건군에 가담하여 당시 곽자흥의 부장이었던 주원장의 수하가 되었고, 주원장이 위기에 빠졌을 때 몇 차례 구해준 적이 있어 그와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합니다.

1356년 진강을 점령하고 통군원수가 되었고, 1359년 동지추밀원사, 1361년 우승이 되는 등 진급도 빨리 하였습니다. 지정 23년 (1363년)에 파양호 대전 등에서 진우량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지정 24년(1364년), 주원장에 의해 좌상국이 되었습니다. 27년 (1367년) 장사성 지방의 할거세력들을 진압하고, 동년에 정로대장군이 되어 부장군 상우춘과 중원으로 북벌을시작하여, 홍무 원년(1368년), 지금의 베이징인 대도를 점령하여 원나라를 몽고고원으로 쫒아내었습니다. 그 후 매년 출정하여 원나라의 잔여 병력을 공격하였고,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1376년에는 맏딸을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 주체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부원의 코케 테무르에게 한 번 패하기도 하였지만, 이 패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전쟁에서 승리한 훌륭한 장군입니다. 홍무18년(1385년)에 사망했고, 중산왕으로 추대되고 시호는 무령입니다.

 

이선장 李善長 (1314 ~ 1390)

이선장은 명나라의 관료이자 개국공신입니다. 주원장이 곽자흥의 휘하에 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지략보다는 행정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368년 명나라 건국 이후에 정1품 좌승상으로 중서성을 맡아 내정 조직 개편과 행정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1371년에는 명예직인 태사로 물러났습니다. 1380년 호유옹 파벌이 대역죄 혐의로 투옥되었을 때 관련인물로 대역죄인 명단에 이름이 올랐으나, 주원장의 반대로 연좌처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385년 동생 이존의가 호유용과 얽힌 것이 화근이 되어 1390년 숙청되었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유기 劉基 (1311 ~ 1375)

유기는 명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지략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23세가 되던 1333년 원나라의 진사시에 합격하여 원나라의 관직을 제수받습니다. 해적인 방국진이 발호하였을 때 원수부도사의 직책을 맡으면서 유명해 집니다. 이후 유기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합니다. 당시 홍건군을 이끌고 있던 주원장이 명망 높은 유기가 낙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속 간청하여 유기는 주원장 밑에서 일하게 됩니다. 유기는 책사로서 주원장이 진우량을 격파하고 북원을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명 건국 후에는 어사중승, 태사령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나, 큰 직책은 맡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귀족들에게 참소도 많이 당한 편이고, 말년에는 낙향하여 야인으로 지내다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빈곤하게 살기도 하다,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상우춘 常遇春(1330—1369)

자는 백인, 호는 연형, 시호는 충무로 원말 홍건적의 걸출한 장군, 명나라 개국 명장입니다. 1352년 홍건군에 가담하였고, 1355년 주원장에게 귀순하였습니다. 1357년 통군대원수로 승진하였고, 1364년 평장정사로 승진하였습니다. 1367년에는 악국공에 봉해지고 북벌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용맹하며, 결단력이 높은 장수로 평가되고 군대에서의 지휘는 서달 다음이었습니다. 1369년 군영에서 젊은 나이에 급사하였습니다.

 

그림. 서달, 유기, 상우춘, 목영, 이문충

이문충 李文忠(1339-1384),

자는 사본, 안휘성 사람이며, 주원장의 조카입니다. 주원장의 명장이자 모사, 명나라 개국 삼공신입니다. 이문충은 12세(1350년)에 모친 조국장 공주(주원장의 누나)가 세상을 떠났고, 부친 이정이 그를 데리고 반란군 속을 전전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1352년 삼촌 주원장을 다시 만나게 되고, 주원장은 이문충을 만나게 돼서 너무 기뻐 양자로 삼고 성을 자신을 따로 주로 바꾸게 하였습니다. 그 후 많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 이문충은 다시 이씨성을 회복하였고, 1370년 노좌부 장군, 1379년 대도독부 겸 영국자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384년 46세로 사망하였습니다.

 

탕화 汤和(1326 – 1395)

자는 영신, 안휘성 풍양 출신으로 주원장과 같은 고향 동네 출신입니다. 1352년 곽자흥의 봉기군에 참여하여 천호가 되고 주원장에게 편지를 써 의병에 가담할 것을 권했습니다. 1357년 상주를 지키고 장사성 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습니다. 1367년, 정남장군으로써 복건성 등 주로 중국 남동쪽 지방을 점령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서달을 따라 오늘날 산서성, 감숙성, 영하성 등에 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홍무 11년(1378년) 신국공에 봉해지고, 홍무 28년 (1395년)에 사망하였고, 동구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목영 沐英(1344-1392)

명나라 개국 공신, 장군. 자는 문영, 호주 정원(지금 안휘성 정원현)사람이고 주원장의 양자입니다. 1356년 12세의 목영은 주원장을 따라서 전쟁에 따라다니기 시자하였습니다. 1362년, 18살 때 목영은 장전도위 직을 수여받고, 전강 방어에 참가해 군사 요직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토번, 운남성 등에 종군하였고, 운남에 10년간 남아 변경을 안정시켰습다. 1392년에 목영은 태자 주표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고 태자 사후 2개월 후에 운남에서 사망했는데, 그때 나이 48세였습니다. 주원장은 그를 검녕왕으로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이 세습하여 운남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등유 邓愈(1337-1377)

자는 백안, 사주 홍현(지금의 안휘성 사현)사람입니다. 16세에 병력을 이끌고 원나라에 맞서기 시작하고 지정 12년 (1355년)에 만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우이에서 주원장에게 투항하였고 관군총부에 임명되었습니다. 등유는 주원장을 따라 장강을 건너서 태평(지금 안휘성 당투), 집경(지금의 난징)을 정복하는 등의 공을 쌓여서 절서행성참지정사, 절서행성좌승, 호광행성평장, 우어사대부, 태자유덕이 되었습니다. 명 홍무 3년 (1370년)에 서달을 따라서 감숙을 정벌하기도 하였습니다. 1377년에 사망하였고 영하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풍승 冯胜(?—1395)

명나라 개국 명장이며, 정원 (현재 안휘성)사람입니다. 용맹하고, 독서를 좋아하고 병법에 통달하였으며, 지혜도 풍부했다고 합니다. 홍무20년 (1387년) 풍승을 대장군으로 하여 부우덕과 남옥 등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 원정에 나섰고, 나하추를 굴복시키고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들을 모두 숙청하였습니다. 군공을 많이 세워서 송국공에 봉해지고, 태자태사를 지냈으며, 개국공신 제3열에 올랐으나, 사사당했습니다.

 

부우덕 傅友德(?—1394)

명나라 개국 장군. 한족이며 숙주 상성(오늘날 안휘 회북)사람입니다. 1350년 농민봉기군의 수령 유복통에 가담하였고, 진우량쪽에 가담하였다가, 1361년 주원장에게 투항하였습니다. 1367년 북벌부터 원군에 대승을 거두고, 사천성, 운남에서도 공을 세웠습니다. 이와 같은 공으로 영국공, 영천후에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1394년 주원장의 시기를 사서 자결하게 됩니다.

 

남옥 藍玉(?―1393)

정원(지금 안휘성 정원현) 사람. 상우춘의 처남이며,, 명나라 개국공신입니다. 1371년 촉나라를 토벌하고, 1378년 서번을 토벌하여, 1379년 영창후, 1387년에 정로대장군에 명해집니다. 1387년 풍승을 따라 나하추를 정벌하여 대장군이 되고, 1388년 양국공에 임명됩니다. 1390년에는 후광 만족의 반란을 평정하고, 다음해에는 태자태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393년 모반 혐의로 고발되어 처형되었고 그와 함께 2만명이 같이 처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