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회, 국제시사

고대 로마 초기 공화정 시대를 일으킨 위대한 인물들

코알군 2023. 5. 1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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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대 로마 초기공화정(6세기 ~ 4세기, 삼니움 전쟁 전)의 주요 위인들을 알아봤습니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Lucius Tarquinius Collatinus)

고대 로마는 초대왕 로물루스부터 마지막 7대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까지 왕이 다스리는 국가였습니다. 로마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는 수페르부스(거만한)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는데요, 부인과 함께 장인이자 로마 왕이었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친척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겁탈하고 루크레티아는 자살하게 되는데요, 이 사건으로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반란을 일으켜 왕을 몰아내고 집정관에 오르게 됩니다(BC 509년). 이 때부터 로마는 공화정으로 바뀌게 되면서 발전의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브루투스는 이후 에트루리아로 도망간 타르퀴니우스와의 전투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Publius Valerius Poplicola)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는 509년 로마공화정 성립에 동조한 귀족 중 1명으로 로물루스 시대 로마시민이 된 사비니족 출신입니다. 포플리콜라는 에트루리아로 도망간 타르퀴니우스왕이 왕위 탈환하려고 걸어온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 때 사륜마차를 끌고 개선식을 하였는데, 그 이후 로마에서 개선식을 하는 장수는 사륜마차를 끄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는 겸손한 태도로 시민들에게 “사람들을 구애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포플리콜라”라는 성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원전 509년~507년, 504년 4번에 걸쳐 집정관을 하였고, 기원원 503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림. 킨킨나투스, 포플리콜라, 유니우스 브루투스(출처 : www.wikipedia.org)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Lucius Quinctius Cincinnatus)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는 기원전 519년에 태어나서 43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귀족인 퀸크티아(Quinctia) 가문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기원전 460년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이후 테베레강 서쪽에 있는 영지로 은퇴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후 기원전 458년 로마 동쪽의 아이키족의 침입시 로마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강력한 권한을 가진 독재관으로 취임한 후 16일 동안 권한을 행사한 뒤 물러났으며, 439년에는 내란에 대응하여 21일간 독재관으로 취임한 뒤 물러났습니다. 독재관(딕타토르)이라는 권한은 당시 2명이 집정관이 1년간 번갈아 다스리는 로마의 구조에서 1인이 6개월간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며칠만 권한을 행사하고 물러난 그의 행동은 이후에도 많은 귀감이 되었으며, 미국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 등 세계의 많은 도시나 지방들의 그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

카밀루스는 기원전 448년에 태어나서 365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390년경 이탈리아 반도의 북쪽에 살던 많은 갈리아인들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중부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읽고 쓸줄을 몰라 로마인들은 그들을 야만인들이라 불렀지만, 갈리아인들은 수준높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로마를 점령하고 도시를 파괴합니다. 남아있던 로마인들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가서 농성하였고, 막대한 양의 금을 갈리아인들에게 주고서 로마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밀루스는 독재관으로 임명된 뒤 갈리아군이 로마로부터 금을 계량하고 있을 때 갈리아군을 물리치고 로마를 구한 뒤 금을 되찾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다른 로마의 역사가인 폴리비우스는 갈리아군이 로마를 26개월 동안 점령하였고 자발적으로 물러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카밀루스가 로마를 구했다는 것은 많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리아인의 로마 점령과 약탈 이후 카밀루스의 지도하에 폐허가 된 로마가 30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재건되어 카밀루스는 로마의 두 번째 창시자로 여겨집니다. 이후 카밀루스는 기원전 365년 로마를 강타한 전염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